정신건강의학과 한덕현 교수의 답장 당연한 것이 진실입니다
성우 씨,
아쉽게도(?) 우리 인간의 욕망이 존재하는 한, 제가 노는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아요….
저도 성우 씨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때 제가 성우 씨의 얘기를 듣고 한 말을 정확히 다시 하면,
“그렇다면 가수 할 필요가 없겠네요”였죠
당시 제가 본 성우 씨는, 노래를 ‘잘’ 부르고 공연을 ‘잘’하는 가수가 ‘안 되면 어떡하지’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인정하듯 노브레인은 25년 넘게 노래를 한 우리나라 대표 록그룹인데, 노래를 ‘잘’하고 공연을 ‘잘’하고 싶다는 고민을 심각하게 하고 있더군요.
무엇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 못하고 있으니 현재를 버리고 혹은 바꿔서 다른 상태로 가야 한다는 압박에서 비롯됩니다.노브레인은 지난 25년 동안 잘하려고 엄청나게 노력을 했겠죠. 한 해 한 해 더 잘하는 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겠죠. 하지만 그 해답을 찾기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웠을 거예요.
왜냐하면 지금 잘하고 있기 때문이죠!제가 스트라이크를 못 던지는 투수에게 가장 많이 해 주는 말이 ‘투수는 공 던지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이고, 슬럼프에 빠진 타자에게 가장 많이 해주는 말이 ‘타자는 공 치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인데, 선수들이 이 말을 좋아하는 이유는 평소 이 말에 한 글자를 더해서 경기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바로 ‘잘’이라는 글자죠.투수는 공을 ‘잘’ 던지는 사람, 타자는 공을 ‘잘’ 치는 사람으로 말이죠. 이 ‘잘’이라는 말은 선수가 자기 자신의 행동을 이상하게 바꾸는, 즉 자기가 연습하고 생각했던 평소의 자신을 잊게 만드는 놀라운 단어입니다.
25년 넘게 노래를 부르고 공연을 하고 멤버들과 연습을 하는 이 일상이 뭔가 틀렸고, 이상이 있을 거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면, 이는 노브레인의 과거와 현재를 일단 부정하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브레인 스스로도 자신들은 노래를 부를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 것 같 았어요. 예전처럼 신나고, 힘 있고, 솔직하게 어필하며, 대중이 인정하고, 그게 신나서 더 열심히 하고…, 이렇게 성우 씨가 생각하는 과정들이 꼭 맞아떨어져야 가수의 자격이 있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거꾸로 이야기해드린 것이죠. 짧게는 ‘그렇다면 가수 할 필요가 없겠네요’라고 했지만, 길게 이야기하자면, 자기가 하는 퍼포먼스를 기획하고, 반응을 살피고, 예상한 대로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은 기획자가 할 일인데, 그것을 성우 씨가 혼자 다 짊어지고 하려니까, 가수가 아니라는 이야기였죠.
가수가 노래 부르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일에 신경 쓰면, 당연히 노래 부르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그래서 제가 먼저 그럼 노래 부를 자격이 없다고 성우 씨의 가수라는 정체성을 부정해보았더니, 성우 씨가 자신의 정체성을 더 소중하게 인정하더라고요.
이런 일들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흔히 일어납니다. 우리는 불안해지면 시야가 좁아져 나의 당연한 일상을 하찮게 여기고, 이것 외에 다른 특별한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죠. 인간은 욕심이 많아서, 지금 내가 쥐고 있는 것은 벌써 옛것이어서 버려야 하고 새로운 무엇인가는 소중해서 취해야 한다는 마음을 누구나 가지고 있어요.
새로워지는 것과
새로운 트렌드를 받아들이고 적응해 나아가는 것은 다른 개념입니다.25년 된 건물에 인테리어를 하고 새로운 구조를 더할 것이냐, 아니면 건물을 몽땅 무너뜨리고 새 건물을 세울 것이냐의 문제죠. 자신의 것을 인정하고 그 인정을 기반으로 업데이트하고 더하는 것이 ‘변화’라면, 지금 있는 것을 부정하고 새로 만드는 것은 ‘잘하라는 강요’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지금 혹은 과거의 우리 자신을 인정하기를 불안해합니다.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혹은 인정해버리면 발전이 없으니 부정해야 뭔가 새로운 삶이 있다고 자신을 위로하려 합니다. 하지만
과거나 지금의 우리 모습은 현재를 있게 한 최고의 연습이었고, 오늘의 나의 토대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고 직장을 가고, 주말에 가족 혹은 친구들과 여가를 즐기는 과정들…, 이것들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가 특별한 성과를 이루는 데 양분이 되어준 것이죠.
그런데 이런 기초적이고 평범한 일상은 자극과 특별함을 추구하는 현대에는 그 가치가 많이 절하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우리는 코로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주 평범한 일상이 통제되고, 제한당하면서 그 평범한 가치가 재조명되었죠.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이유 있는 통제’ 즉 논리적 통제를 당해야 했습니다. 과거 외적의 침입이나, 전쟁 혹은 정치적 목적의 통제와 억압을 당했을 때는 비논리적 통제, 즉 부당한 억압과 통제였기 때문에 대놓고 저항하고 목숨까지 바쳐가며 자유를 쟁취하는 능동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는 국가의 방역 수칙과 통제를 따라야 했습니다. 내 자신의 건강과 안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서도 말이죠. 하지만 여기에는 구체적으로 대놓고 저항할 수 있는 외부의 대상도 없습니다. 누가 언제 어떻게 이 나쁜 바이러스를 퍼뜨렸는지,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는지, 앞으로 비슷한 일이 발생하면 또 다른 답답함이 나에게 올 것 같은 모호함과 막막함 그 자체가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들고 있는 것이죠.
우울증이 생기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깥으로 향하는 공격성이 바깥 대상을 찾지 못해서, 나에게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즉, 원망할 대상이 없으니까 지금 이렇게 우울한 상황을 만든 것은 결국 ‘나’이구나 하고 자신을 탓해버리는 것이죠.
그러니 지금 성우 씨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느끼는 우울감은 당연한 겁니다. 다시 평범했던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내가 나대로 느끼고,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여, 우리의 직감을 교류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할 겁니다.
한덕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