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의학과 한덕현 교수의 답장 대인관계에도 완벽주의가 필요할까요?
정신건강의학과 한덕현 교수
성우 씨 말처럼 정말 대화의 시작이나 끝에,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식사 하셨어요?’ 혹은 ‘식사 한번 하시죠’가 아닐까 합니다.
우선, 밥 먹자는 말에는 인간 본능의 많은 부분이 숨어 있죠. 배를 불려서 힘을 내고자 하는 원초적 욕구는 물론, 일단 음식이 들어가서 내 입을 움직이고 뭔가를 씹고 삼키는 입의 본능을 만족시키는 면이 있지요.
이를 인간 발달 이론에서는 구강기의 만족이라고 하는데,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어린 시기에 갖는 본능이라고 합니다. 아이가 엄마 젖을 빨면서 만족하는 것이라고 보면 되죠. 그런 가장 원초적 본능이 성인기에 접어들어서도 당연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과의 만남에서 상대방의 가장 기본적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합니다. 내가 이 사람과의 만남이 만족으로 끝날지 싸움으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단 원초적 욕구라도 만족시켜놓으면 최소 기본은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겠죠. 그래서 식사 제안은 상대방의 경계를 늦추고, 나의 감정을 어필하겠다는 전조 신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식사 제안 같은 방법은 대인관계에서 나를 편안하게 만들 수 있어요.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는 식사 약속을 잡기가 어려웠죠. 특히 모르는 사람과 처음 만나거나,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과 약속을 잡을 때는 더욱 그랬습니다. 만나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팬데믹 이전 시기보다 훨씬 짧게 끝났죠. 원초적 욕구 만족의 기본 점수 없이 바로 본 경기에 들어가 상대방으로부터 점수를 획득해야 하는, 조금은 삭막한 관계를 시작하고 유지해야 했습니다.
마스크, 가림막 등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막고 보호하는 장비들은 늘어나고, 거리를 좁힐 방법들은 줄어들었어요. 그런 가운데 온라인 만남이 늘어났습니다.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는 사소한 오해로도 가벼운 다툼이 쉽게 생길 수 있죠. 그럴 때 우리는 상대방을 탓하고 또 이해하고, 나는 무죄 혹은 조금 잘못 등의 주관적 혹은 객관적인 판단을 하며 자기의 원망과 미움을 해결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잘 안 될 때, 즉
모든 잘못과 원망이 외부에서 해결이 안 되고 나에게로 향할 때, 우리는 현실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우울해지는 것입니다.아무튼 이렇게 오프라인 만남이 줄어든 때,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면 대인관계의 기술이 크게 늘어나지 않을까요?
대인관계를 어려워하는 환자들과 집단 상담 치료를 할 때, 저는 가끔 환자들과 제 사이에 있는 테이블을 치워봅니다. 그러면 환자들이 상당히 부담스러워 하죠. 원래 집단 상담을 할 때, 환자들은 테이블 위에 손을 놓거나, 종이로 뭔가를 쓰면서 치료자 혹은 서로 간의 어색함을 달래거든요. 그런데 집단 상담이 진행되면서 대인관계의 기술이 향상되어가고 있을 때, 이렇게 테이블을 없애면 환자들은 치료 시간에도 서로 간의 대화를 어색해합니다.
테이블이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시켜주기 때문입니다. 1미터도 안 되는 너비지만, 눈에 보이는 거리가 구체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최소 그만큼은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안정감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대인관계의 기술이 정말 좋아진 사람들은 이 눈에 보이는 거리를 없애도 불안감 없이 이 기술을 그대로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우 씨, 록커는 사람 관계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대범한 사람이어야만 할까요?제가 좋아하는 퀸의 프레디 머큐리만 보더라도 (비록 영화와 인터넷 소개로만 봤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오히려 인간관계에 더 민감하고 어떤 때는 더 미숙하고 조심스러워 하는 것 같아 보이더라고요.
록커는 ‘대인관계에 대범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감정을 여과 없이 폭발시켜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선입견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감정을 노래하고, 감정의 표현을 폭발시켜야 하는 직업이라 본인이든 다른 사람의 감정이든 더 세심하게 살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대인관계의 완벽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직업과 신분에 상관없이 대인관계를 좋아하면서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간에 보통 좋아하는 일이라면 즐겁고 쉬워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대인관계를 좋아하면서도 어려워하죠.
그 이유는 대인관계에서, 자기와 상대하는 사람을 항상 기분 좋게 해야만 하고, 기분 나쁘게 하거나 불편하게 하면 자기가 큰 잘못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지 못하면 그것은 곧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만든 것이라고까지 생각해버리기도 하죠.
이런 사람들은 여럿이 모여 있을 때 1분의 침묵도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내가 사람들 모아놓고 이렇게 어색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으로든, 이 침묵을 깨야만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또 상대방을 만날 때는 ‘어떤 음식을 좋아할까, 혹시 어떤 음식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 것은 아닐까? 만나는 장소의 분위기가 너무 시끄럽지는 않을까?’ 생각하죠. 그래서 사람을 만나고 나면 힘들어요. 시간, 장소, 기호, 음식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야 하니까요. 3명을 만나면 3명만큼 힘들고 10명을 만나면 10명만큼 힘든 것이죠.
그래서 정작 상대방과 감정이나 생각의 교류를 하고 싶어도 그 외의 것에 신경을 쓰다 보니, 시간도 없고 에너지도 부족하여 교감을 나누지 못하게 됩니다. 침묵을 깨기 위해 준비한 의미 없는 이야기로 대화가 흐르기도 하고, 심혈을 기울여 잡아놓은 장소나 음식에 대한 반응이 신경 쓰여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 걱정만 하며 시간을 보내죠.
대인관계는 말 그대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입니다.내가 혼자 생각하고 예상하는 대로 흘러가기 어려운 것이 당연합니다. 대인관계를 편하게 즐기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꺼내놓고, 상대방의 반응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상대방의 반응을 관찰할 때, 도덕적 판단을 필수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내가 던진 자극에 상대방이 반응하면, 습관적으로 잘했다 못했다 같은 도덕적 판단을 합니다. 그리고 그 도덕적 판단에 따라 대인관계의 가치를 매깁니다.
하지만 우리 일상의 대인관계는 그런 도덕적 판단을 위한 관계가 아니라, 감정의 교류를 위한 관계입니다. 내가 느낀 감정이 옳다 그르다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노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를 듣고 어떤 사람은 신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냥 보통이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렇구나’ 해야 하는데, 신나지 않는다는 사람을 두고 ‘혹시 노브레인을 싫어하는 거 아니야? 혹시 우리 그룹을 음해하는 건 아니야?’라고 생각한다면 감정의 교류가 어렵고 관계가 힘들겠죠. 그래서 편안한 대인 관계를 위한 마지막 세 번째 방법으로,
상대방의 반응을 보는 우리 자신도 그냥 놓아두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죠.
“그럴 수도 있겠네.”
한덕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