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미지 않은 순수함으로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늦깍이 한글학교 어르신들의 마음이 담긴 시와 산문 모음집이다.
문학 작품을 읽다보면 가슴이 뻥뚫릴 때도 있고 머리가 맑아지거나 마음이 꽉차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때로는 진리를 삼킬듯한 언중유골의 논리 전개가, 때로는 나의 과거와 겹쳐지며 애절한 슬픔과 위로가, 때로는 꾸미지 않은 순수함과 일상에서 보기 드문 신선함이 그렇다.
글을 쓰는데 활용되는 온갖 미사여구와 수사들 그리고 기상천외한 전개방식과 창의성을 자극하는 소재들이 있겠지만 이것들을 모두 걷어내고도 심금을 울려주는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글
도 있다. 바로 이 책이 그렇다.
60살이 넘어 늦은 연세에 한글학교에서 이제 막 한글을 깨우치신 어르신의 글엔 한글을 차고 넘치게 사용해 온 보통사람들의 책에서 볼 수 없는 순수함과 진정성
이 담겨있다.
한글을 배우고 익힌다 함은 마음이 아닌 머리가 시키는 일인 것 같은데도 이 책에 담긴 어르신들의 공부에 대한 열의와 행복은 마음
에 담겨있다. 서로 다른 분들이 쓰신 글임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이 두근거렸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 그에 대한 방증이다.
때로는 손자 손녀들이 동화책을 읽어달라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한글을 모르는 것을 감추기 위해 전전긍긍함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다른 집에 팔려와 기구한 삶을 이어가신 어르신이 들었던 “눈 뜬 장님”이라는 모멸감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짝사랑 하던 하숙집 대학생 아들의 편지에 답장을 못해 마음을 주고 받지 못하고 인연을 이어가지 못한 애절함도 담겨있다. 80년 가까운 인생을 사시면서 얼마나 한이 맺힌 애절함일까?
액션 영화를 좋아함에도 자막을 읽지 못해 외국 영화를 볼 수 없는 것부터 노래방에서 노래를 검색하지 못해 예약하지 못하는 일까지 일반인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삶의 일부는 누군가에게 큰 시련이자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안타까웠다.
한글을 몰라 이를 표현하고 이해하지 못했을 뿐 그 안에 수십 년 쌓인 세월의 무게는 여느 일반인들이 감당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다. 그 안에 담긴 무게를 이제 막 배운 한글로 표현해 나가는 이 책의 시와 산문들은 빛나는 원석
과도 같다.
배움에 대한 열정과 보람 또한 신선했다. 김영순 할머니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태산을 집어삼킬만한 배움의 강렬한 의지
가 보인다. 어떻게 저런 유순한 일상의 말로도 배움의 의지를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인지 몇 번을 곱씹어 읽었다.
공부를 하고 나서 온몸의 장기가 웃는다고 표현하신 이순덕 할머니의 시 또한 그러하다. 웃음과 장기라는 단어가 자주 엮이지 않음이 상식인 바 이 부조화스러운 두 단어가 주는 순수한 강렬함
이 신선했다.
어르신들의 한글을 배우는 열의와 과정 그리고 한글을 몰라 겪었던 서러운 과거와 마음의 상처들 외에도 이 책에서 곱씹어 볼 만한 꺼리가 또 있는데 그것은 긴 세월
쌓여온 마음과 추억이다.
한글을 알고 모름과 상관없이 같은 인간으로써 저마다의 무게를 안고 살아가며 느끼는 회환과 깨달음이 어르신들의 글에 담겨있다. 남편이나 자식 혹은 부모님들을 그리워 하는 애절함을 읽고 있노라면 전혀 다른 사람들끼리 왜 이렇게 느끼는 마음은 비슷할까 싶으면서도 같은 주제를 바라보고 승화시키는 자세에서는 긴 세월 살아 온 어르신들에게서만 배울 수 있는 특별함도 담겨있어 신비스럽다.
읽는 내내 웃음이 터져나오는가 하면 스멀스멀 올라오는 감정에 복 받치기도 한다. 한글은 이제 막 배우셨지만 87분의 어르신들의 세월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표출할 수 없어 꾹꾹 눌려 온 감정의 폭발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세다.
나보다 갑절의 고난과 시련을 겪으신 87분의 어르신들이 시원한 산들바람처럼 내 안의 마음을
다독여
주는 느낌
이 책을 읽고 가장 강렬하게 남은 느낌을 이 말로 대신할까 한다. 슬프거나 힘든 녹록치 않은 인생에 찌들어버린 내 마음을 한 번 쯤 깨끗하게 정화시켜보는 것은 어떨지 이 책을 선뜻 내어주신 어르신들의 마음에 감사를 표하며 리뷰를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