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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튜링, 비운의 컴퓨터 선구자

한빛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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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5

|

by 한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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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앨런 튜링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하다.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한 그의 공로로 그는 영원히 지속될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세상을 떠나고 수십 년이 지난 뒤의 일로, 블레츨리 파크의 이야기가 세상에 공개되기 전까지는 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자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던 앨런 튜링(1912~1954)은 오늘날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하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블레츨리 파크의 암호화 학교가 2차 세계대전 내내 적의 암호 메시지를 수집하고 앨런 튜링이 수집한 암호해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1970년대 뒤늦게 공개되기 전까지는 그의 이름과 업적은 순수수학과 컴퓨터 과학이라는 학문 영역에 갇혀 있었다.

 

튜링은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은 여러 사건과 발견 들로 가득 차 있다. 그의 부모는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를 관리하던 공무원이었다. 부모님은 간간히 영국에 돌아왔으며, 튜링은 다른 집에 맡겨진 채 대부분의 시간을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다. 튜링은 기숙학교에 입학했으며, 운동보다는 과학과 수학을 더 좋아했다. 졸업 후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 입학했는데, 놀랍게도 자신이 운동도 좋아한다는 사실과 동성애적 기질을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는 실제로 대학 조정팀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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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튜링을 포함해 수많은 위대한 암호해독가들이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서 배출되었다.]

 

논문 「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 문제의 응용에 관하여」로 학계의 인정을 받은 앨런 튜링은 미국에서 2년 동안 일한 뒤 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에 에니그마(Enigma) 문제를 해결할 전문가로 블레츨리 파크에 들어갔다. 전쟁이 끝나고 수년 간 컴퓨팅 기계 설계에 집중했으며,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생물 형태 연구라는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또한, 그 시간 동안 운동을 열심히 한 덕분에 1948년 올림픽 선수단에 아깝게 뽑히지 못했을 만큼 훌륭한 중장거리 달리기 기록을 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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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 성격의 천재 과학자였던 앨런 튜링은 운동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1948년 영국 장거리 달리기 대표 선수가 될 뻔했을 만큼 운동에 뛰어났다.]

 

그러나 앨런의 동성애적 성적 지향은 그가 일찍 생을 마감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52년 초, 앨런 튜링은 자신의 집에서 남자와 성관계를 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고, 감옥에 가거나 벌금을 내는 대신 성욕을 억제하는 화학적 거세를 당했다. 그는 이런 고문과도 같은 처벌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부작용에서 회복하는 듯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42번째 생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1954년에 자살했다. 오늘날 되돌아보면,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공로를 세운 사람을 이렇게도 취급할 수 있다는 게 매우 불합리하고 부조리해 보일 수도 있다. 훗날 영국 정부는 사과하였고, 그로부터 몇 년 후 영국 여왕의 특별 사면령이 내려졌다. 같은 이유로 기소된 모든 사람이 아니라 업적을 세운 한 사람만 사면하는 것이 차별적인 조치였다고 판단한 영국 정부는 2017년 법령에 의거해더 포괄적으로 사과하였다.

 

앨런 튜링은 자신의 논문에서 제시한 튜링 머신을 실제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기계를 좋아했다. 논문을 발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곱셈 기계를 만들었고, 리만 제타 함수의 해를 찾는 아날로그 기계를 만드는 일을 시작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튜링은 기계를 이용하는 데 익숙했던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며 암호해독에 매우 큰 기여를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새로운 형태의 컴퓨팅 기계 발전으로 이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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