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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 네트워크
저자 : 임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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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래밍은 상상이다 제5장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사회 중에서"
컴퓨터 바이러스는 인터넷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이다.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 이메일, 채팅, 전자상거래 등과 같은 화려한‘피사체(被寫體)’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양지에서 발전하는 동안 컴퓨터 바이러스라는‘그림자’는 모습과 형태를 달리하면서 음지에서‘발전’해 왔다. 바이러스를 예방하거나 제거하기 위한 백신 프로그램의 성능도 꾸준히 향상되었지만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바이러스를 원천봉쇄하기는 언제나 역부족이었다.
인터넷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컴퓨터 바이러스가 주로 플로피 디스크(floppy disk)를 통해서 유포되었다. 지금은 CD에 밀려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작은 크기의 파일을 손쉽게 복사하거나 저장할 수 있는 플로피 디스크는 10년 전만 해도 폭넓게 이용되는 매체였다.“ 스스로를 복제하는 작은 소프트웨어 조각”을 의미하는 컴퓨터 바이러스는 사람들이 플로피 디스크로 복사하는 파일의 내부에 숨어 있다가 그 플로피 디스크가 다른 컴퓨터의 드라이브(drive)에 꽂히기를 기다렸다.
자신의 숙주(宿主)인 플로피 디스크가 새로운 컴퓨터에 도달하면 숨어 있던 바이러스는 때를 놓칠 새라 스스로를 복제하여 다른 파일의 내부로 숨어 들었다. 이렇게 감염된 파일 중의 어느 하나가 플로피 디스크를 통해서 또 다른 컴퓨터에 도달하기를 열렬히 희망하면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복제된 바이러스는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을 삭제한다든지, 메모리 사용량을 터무니없이 증가시켜서 컴퓨터의 동작을 멈추게 한다든지 하는 등의 악의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컴퓨터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은 바이러스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파일을 복제하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바이러스가 치명적이긴 했지만 이렇게‘원시적인’방법으로 복제되는 바이러스는 기껏해야 몇몇 PC를 감염시킬 수 있을 뿐이었다. 일단 바이러스에 감염된 PC는 백신 프로그램으로 치료를 받고, 바이러스의 숙주 노릇을 하던 플로피 디스크는 대부분 구겨져서 쓰레기통으로 던져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인터넷이 대중화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인터넷을 통해서‘문명의 혜택’을 입은 것은 네티즌만이 아니라 바이러스도 해당되었던 것이다.
인터넷이 인터넷일 수 있는 것은 수없이 많은 컴퓨터가 네트워크를 통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파일 공유 프로그램이나 FTP(파일 전송 프로토콜-File Transfer Protocol)을 이용하면 파일을 컴퓨터‘갑’에서 컴퓨터‘을’로 순식간에 복사할 수 있기 때문에 플로피 디스크와 같은 매체는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었다. 따라서 플로피 디스크는 숙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제 바이러스는 플로피 디스크가 없어도 인터넷을 타고 서울에 있는 초등학교의 PC에서 브라질의 병원에 있는 PC로, 뉴질랜드의 도서관에 있는 PC에서 모스크바의 가정집에 있는 PC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기복제의 가능성이 무제한적으로 열렸다는 점에서 바이러스는 전율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이러스와 싸우는 프로그래머들이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매우 빠른 속도로 기능이 향상되는 백신 프로그램과 엄격한 필터링 기능을 갖춘 방화벽(firewall) 등이 도입되면서 바이러스의 자기복제는 억제되었다. 무제한적인 자기복제란 실현될 수 없는 꿈에 불과했다. 그러나 바이러스(사실은 바이러스를 만드는 짓궂은 프로그래머들)는 다른 곳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컴퓨터의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를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유분방한 사람의 심리를 파고드는 전략이 그것이었다.
지난 1월 말에 창궐한‘마이둠’바이러스는 이메일을 통해서 전염되는 바이러스였다. 가까운 사람에게서 온 이메일에 첨부되어 있는 파일을 열어보는 순간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전염되는 방식이었다. 일단 감염된 컴퓨터는 이메일 주소록에 저장된 사람들에게 비슷한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서 또 다른 컴퓨터를 감염시켰다. 이와 같은 방식을 채택한 바이러스(엄밀하게 말하면 바이러스와는 조금 다른‘웜(worm)’)은 마이둠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첨부된 파일을 열어보지 않을 수 없도록 유혹한 마이둠은 발생 36시간 만에 1억 통의 메일을 통해서 전 세계 PC의 22%를 감염시켰다. 플로피 디스크라는 느릿느릿한 숙주를 통해서 번식하던 시절의 바이러스가 보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속도였다.
단순히 이메일을 뿌리는 것은 PC의 동작을 멈추게 하고 파일을 삭제하는 것에 비해서 덜 심각한 문제로 비춰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이메일 전송량은 네트워크의 속도를 현저하게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네트워크의 동작을 완전히 멈추게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결코‘덜’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곳에 놓여 있지 않았다. 마이둠처럼 이메일을 이용해서 번식하는 웜은 타인을 신뢰하는 사람의 마음을 나쁜 목적으로 파고든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나쁘고 치명적이다.
톰 행크스가 주연했던 영화 <그린마일(The Green Mile)>에 등장하는 흑인 주인공이 슬퍼하고 분노했던 것도 바로“서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악용하는 세상의 혼탁과 이기심이었다. 필자는 프로그래머의 한 사람으로서 이유야 어쨌든 바이러스나 웜을 제작하는 사람들이 제발 지금과 같이 사람의 선한 심리를 악용하는 방식으로 바이러스를 유포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PC는 백신 프로그램으로 치료할 수 있지만, 한번 타인을 믿지 못하게 된 사람의 마음은 쉽게 치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믿음을 악용하는 바이러스는 용서받기 힘든 영혼의 바이러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