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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 네트워크
저자 : 존 그레이엄-커밍(John Graham-Cumming)
역자 : 전경원
원문 :
The 100-year leap
1837년 12월, 영국의 수학자 찰스 배비지는 해석기관이라고 알려진 기계적 컴퓨터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전기적 컴퓨터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배비지의 기계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배비지의 설계는 비록 놋쇠와 철을 이용하지만, (제조소라고 이름 붙인) 중앙 처리 장치와 많은 양의 확장 가능한 (저장소라고 이름 붙인) 기억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기관은 천공카드에 기록한 프로그램으로 작동되었고, 입력 자료도 천공카드에 기록해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배비지의 해석기관에 사용한 천공카드
제조소 내부에서는 각각의 개별 연산에 해당하는 마이크로프로그램이 제조소를 통제한다. 마이크로프로그램은 배비지가 배럴이라고 부른, (오르골의 음계판과 비슷한 형태의) 징이 박힌 원통에 저장된다. 자료는 저장소에서 제조소로 전송해서 처리하고, 저장소로 다시 돌려보내어 나중에 재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배비지의 설계도엔 각기 40자리의 숫자를 저장할 수 있는 100개의 저장 장치(대략 1.7KB에 해당한다.)가 자리하고 있다. 그는 더 나아가서 1,000개의 저장장치(17KB)와 외부 저장장치(아마도 현재의 디스크 구실을 하는 천공카드를 사용했을 것 같다.)를 갖춘 기관이 필요할 거라고 예상했다.
해석 기관의 도면엔 결과의 출력 용도로 인쇄기와 도면 출력 장치를 모두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기관이 완성되었다면, 증기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이 기관은 작은 증기 기관차만 했을 것이다. 이 기관의 프로그램 언어(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는 반복문과 제어문까지 갖추고 있다. 해석기관의 구조에서 유일하게 이상한 것은 이것을 발명한 시대이다.
10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배비지의 업적은 거의 잊혀지고, 컴퓨터가 나타났다. 1930년대 후반부와 1940년대에, 앨런 튜링의 1936년 논문 "결정문제의 응용 관점에서 본 계산 가능한 수에 관한 연구"를 시작으로 미국과 영국에서 실제 운용 가능한 컴퓨터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배비지가 한 세기 전에 한 발명의 재발명에 불과하다. 배비지는 그의 기관이 가져올 충격을 예측하고, 이를 자신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남겼다. "해석기관이 완성되자마자, 이 기계는 필연적으로 과학의 미래를 이끌어갈 것이다."
배비지는 일생동안 해석기관의 (런던의 과학박물관에서 관람할 수 있는) 일부만을 만들 수 있었다. 배비지가 죽고 나서, 그의 아들인 H. P. 배비지는 아버지의 설계를 바탕으로 제조소를 시연할 수 있었다. 배비지는 해석기관에 대한 방대한 문서와 설계도를 남겼는데, 이것들은 런던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으며 역사가들에게 검증을 받았다.
해석기관의 제조소 사진
배비지는 (로그표와 같은) 수학표를 자동으로 생성하는 기계를 만들면서 해석기관에 관한 착상을 얻었다. 그 당시엔 (그리고 20세기까지도 줄곧) 수학표를 광범위하게 이용했는데, "계산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손으로 계산해서 이 수학표를 만들었다. 배비지는 계산자를 대신하여 이러한 일련의 계산을 자동으로 수행할 기계를 만들면, 계산자의 실수로 발생하는 오차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가 발명한 기계가 (차분법이라는 수학적 기법을 이용하여 계산하는) 차분기관이다. 배비지는 그의 까다로운 성격과 영국 정부의 지원 철회로 평생, 이 기계를 완성하지 못했다. 배비지의 기관을 구상하고 만드는 일은 1800년대에는 막대한 시간과 자금이 필요한 일이었다. 배비지는 일이 계속 지연됨에도, 자신의 재산을 출자해가며 죽을 때까지 홀로 기관을 설계하고 도면을 다듬는 일에 매달렸다. 20세기 컴퓨터 분야의 선구자인 모리스 윌키스는 해석기관에 관한 일을 하면서 "[배비지의] 지적인 삶의 고독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혀 지냈다."라고 남기기도 했다.
영국 정부는 초기에 첫 번째 차분기관의 제작 비용 중 일부를 지원하는 등 배비지를 후원했다. 하지만, 제작 비용이 치솟고 제작 기간이 길어지면서 배비지의 기계는 별 쓸모가 없을 것이라는, 그리고 배비지의 기계에 쏟아 부은 돈을 투자나(이 돈이 충고를 건넨 사람들에게 가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더 많은 인간 "계산자"를 고용하는 데 쓰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충고를 받게 되었다.
배비지는 정신적 노동으로 가능했던 일을 기계적으로 수행해내는 자신의 기계가 인류에게 거대한 혜택을 가져다줄 거라는 신념으로 외로이 연구를 계속해 나가면서, 자신의 발명품이 "올바로 평가받는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그 시대에 살고 있다. 1980년대 후반부에 런던의 과학박물관은 과연 배비지의 기관이 그의 시대에 제작할 수 있었을지를 실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박물관은 배비지의 두 번째 차분기관과 부속 인쇄기를 당시 재료와 정밀도를 고려하여 제작했다. 1991년에 실제 작동이 가능한 기계가 공개되었고, 현재까지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캘리포니아의 마운틴뷰에 있는 컴퓨터역사박물관에도 복제본이 전시되어 있다).
배비지의 두번째 차분기관
과학박물관이 진행한 차분기관 프로젝트는 빅토리아 시대의 기술적 한계에 대한 모든 의심을 잠재웠다. 배비지의 기관은 빅토리아 시대에 제작할 수 있었고, 그의 100년을 앞선 컴퓨터 발명은 실현될 수 있었다.
이제 해석기관을 만들어볼 차례다.
나는 배비지의 꿈이 완성되기를, 그리고 해석기관이 만들어져 전시되기를 희망한다. 나는 배비지의 기관 제작에 필요한 자금을 끌어오고, 사람을 모집하는
28번 설계도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배비지는 해석기관에 관한 방대한 문서를 남겼고, 배비지가 특별히 제작한 마호가니 상자에 들어 있는 28번(과 28a) 설계도엔 그중에서 가장 완벽한 해석기관이 담겨 있다.
해석기관을 제작하기 위해선 세 가지 중요한 단계를 거쳐야 한다.
1. 해석기관의 구성요소를 결정한다.
2. 해석기관을 컴퓨터로 모의실험하여, 물리적 기계의 오류를 찾아서 수정한다.
3. 해석기관을 실제로 제작한다.
배비지는 지속적으로 그의 설계를 (간소화하고 빠른 계산 속도를 낼 수 있도록) 개선했고, 이것들이 그의 설계도와 공책에 뒤섞여있기 때문에 첫 번째 단계를 밟아야 한다. 그의 자료를 분류하는 데에는 빅토리아 시대의 공학 기술에 정통한 전문가와 역사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3차원 모형 소프트웨어와 물리 엔진을 이용해 해석기관을 모의실험해 보면, 실제 금속 부품을 만들지 않아도 기계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기계의 크기와 복잡성을 고려할 때, 이 단계는 필수적이다. 기계의 완성본을 지속적으로 사용한다면 파손의 위험이 있으므로, 기관의 작동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도 모의실험을 활용할 수 있다.
발명한 지 170년이나 지난, 거대하고 상대적으로 보잘것없는 컴퓨터를 제작하는 일이 어리석게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해석기관의 완성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여러분 자신의 시대보다 100년을 앞서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흥미롭지만 비현실적인" 생각을 지원해주면, 모든 사람의 삶에 환상적인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 컴퓨터가 현대에 가져온 충격을 생각해보면, 배비지의 기관이 버려지지 않고 완성되었을 때 빅토리아 시대에 주었을 변화는 상상이 가질 않는다.
단기적 가치도 없이 비용만 많이 들어갈 것처럼 보였던 연구가 인류의 가장 위대한 혁명 중 하나를 가져다준 씨앗으로 밝혀졌다. 다음 세대의 과학자들이 완성된 해석기관 앞에 서서, 배비지를 떠올리며 그들 자신의 100년의 도약에 관한 영감을 얻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