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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팅과 여성

한빛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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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1

|

by 한빛

12,629

세계 최초의 여성 소프트웨어 전문가 에이다

 

러브레이스 백작부인이었던 에이다(1815~1852)는 컴퓨팅의 역사에서 가장 로맨틱한 인물이다. 영국의 유명한 시인 조지 바이런의 외동딸이었으나, 그녀는 아버지를 만나보지 못했다. 덕분에 그녀는 지적이기는 했으나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살았다. 에이다는 18살에 찰스 배비지를 만나 함께 일하기 시작해 36살의 나이로 암에 걸려 죽을 때까지 배비지와 같이 일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당시 배비지는 42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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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바이런의 딸로 태어난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해석기관 개발을 위해 배비지와 함께 일했으며, 해석기관을 사용해 베르누이 수를 계산하는 알고리즘도 개발했다.]

 

그녀는 주로 해석기관에 대한 배비지의 생각을 통역하는 방식으로 연구에 기여했다. 수학자이자 군사공학자로 훗날 이탈리아의 수상이 된 루이지 메나브레아가 프랑스어로 해석기관에 관한 설명서를 썼다. 에이다는 영국에서 출판하기 위해 그 설명서를 번역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A부터 G까지 7개의 주석을 추가했다. 주석은 원문보다 무려 3배나 길었고, 해석기관을 이용해 할 수 있는 일을 훨씬 자세히 설명했다.

 

특히 베르누이 수를 계산하는 알고리즘을 다룬 주석 G가 가장 유명하다. 베르누이 수는 유리수(p/q처럼 두 정수의 분수로 쓸 수 있는 모든 수)의 수열로 수 이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에이다는 주석 G에서 알고리즘을 여러 단계로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알고리즘 실행해 필요한 연산 카드들도 설명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에이다 러브레이스가 컴퓨터 프로그램을 작성한 첫 번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주석 G 외에도 에이다의 앞선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주석이 있다. 그녀는 주석 A에서 해석기관이 숫자 이외의 것도 다룰 수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음악의 음도 해석기관에서 기호로 사용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해석기관이 정교하고 과학적인 음악을 작곡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에이다는 다른 사람들처럼 글 옆에 자신의 이름을 이니셜 ‘AAL’로 써놓았다. 다른 수학자들에게 이니셜 AAL이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았다는 사실은 당시의 사회 상황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AAL이라는 이니셜을 가진 수학자 즉, 남자 수학자를 알지 못했다.

 

유색 계산 전문가

 

1941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행정명령 8802호에 의해 미국 국방 산업에서 인종차별을 폐지했다. 1943년 인종차별금지는 계산 전문가 부족에 대한 해결책으로 고려되었으며, 그해 말 최초로 유색 여성 계산 전문가들이 버지니아주 랭글리에서 기계식 탁상 계산기를 사용해 복잡한 수학 계산을 하며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변 상황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처음 몇 달 동안 그들은 ‘유색 계산 전문가(colored computers)’라는 표시가 붙은 식탁에서 따로 점심을 먹어야 했다. 화장실조차 함께 사용하지 못했다. 인종차별금지는 아직 먼 나라 이야기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희망을 써 내려갔다. 식탁에서 표시를 없앴으며,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편견을 하나 둘씩 없애나갔다. 그들은 새로운 컴퓨팅 기계의 프로그래밍에서 훌륭한 역할을 했으며, 인종차별금지라는 또 다른 전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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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버지니아주 랭글리에서 유색 계산 전문가들이 채용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많은 이들이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매우 성공적이고 훌륭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유리천장을 깨자

 

우월의식 혹은 통제하고픈 욕구가 1960년대 소프트웨어 위기를 이끌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남녀가 함께 일했던 사회 환경 덕분에 초창기 프로그래머들 가운데는 여자가 많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시간이 흐르자 남자들은 전쟁 이전 자신들의 일과 역할을 되찾거나 새롭고 고급스러운 직업을 독차지하고 싶어 했다. 이로 인해 여성들이 일자리를 잃고 밀려나는 문제가 발생했다. 여성 컴퓨터 전문가들은 이런 변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맡은 일에서 밀려나거나 차별대우를 받았다. 결국, 프로그래머가 부족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성 프로그래머가 부족해졌다. 그 결과는 소프트웨어의 위기로 이어졌다.

 

소프트웨어 위기 덕분에 여성 프로그래머들은 다시 컴퓨팅 세계에 뛰어들 기회를 잡았다. 미국과 영국의 적극적인 여성 프로그래머들은 자체적으로 내부 프로그래밍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던 고객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의뢰받아 개발해주는회사를 세웠다.

 

미국 여성 엘시 셔트(Elsie Shutt)는 임신했다는 이유로 법에 따라 강제로 퇴사했다. 그런데 이 법은 자영업자에게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자영업자는 자기 방식대로 일할 수 있었다. 그녀는 생각이 비슷하고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여성 프로그래머들을 채용해 컴퓨테이션즈라는 회사를 세웠다. 1963년 『비즈니스 위크』에는 엘시 셔트가 세운 회사를 ‘임산부 프로그래머 모임’이라고 깎아내리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이 회사는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번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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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니 셜리는 유리 천장에 막혀 승진하지 못하자, 우체국을 나와 ‘프리랜서 프로그래머’라는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그녀는 거의 여성만을 고용했으며, 직원들에게 다른 곳에서는 누리기 어려운 기회를 제공했다.]

 

영국인 스테파니 셜리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녀도 회사를 나와 컴퓨팅 기업을 세웠는데, 엘시 셔트처럼 법 때문이 아니라 고용주의 태도 때문이었다. 우체국에 근무했던 그녀는 승진에서 반복적으로 제외되었고 결국 우체국을 나왔다. 민간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그녀는 엘시 셔트처럼 회사를 세우고 집안일과 프로그래밍을 병행하는 여성들을 채용했다. 그녀는 잠재 고객들에게 편지를 쓸 때 ‘스테파니 셜리’ 대신 ‘스티브 셜리’라는 이름을 사용하면 좀 더 쉽게 일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한, 전화를 건 고객이 소리를 듣고 보통의 사무실처럼 느끼도록 타자기 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를 집에 틀어놓았다. 스테파니 셜리 또한 사업에 성공했고, 그녀는 2000년에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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